
조선신학원 설립-‘이소성대’(以小成大)의 신앙
1873년∼1940년. 교육사업가. 경상북도 영일 출신. 1901년 관립의학교를 수료하고 그해에 숭령전참봉(崇靈殿參奉)이 되었다. 그뒤 흥해면협의원·흥해공립보통학교 교무위원·흥해명신학교 학감 등을 역임하면서 개화기 교육사업에 공헌하였다. 기독교로 개종한 뒤 서울로 이주하여 승동교회에 적을 두었고, 1923년에 장로가 되었다. 1938년 평양신학교가 신사참배문제로 폐쇄된 뒤, 목사양성기관을 만들기 위하여 조선신학교설립위원회가 구성되었을 때 거액을 설립기금으로 내놓았다. 그런데 설립인가를 받아내지 못하여 조선신학교는 1940년 4월 19일에 경기도지사의 사설학원인가로 개원할 수밖에 없었는데, 초대학원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이 학원을 설립하고 후원하였을 때 그를 강력하게 만류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한국인들이 신학교를 세워서 교육하는 일은 선교사들의 과거의 공로와 업적을 무시하는 배신행위라고 혹평하였다. 그러나 그는 조선교회 목사양성을 조선교회가 자주적으로 해야 한다고 확신하였다. 이 신학교는 한국신학대학의 전신이 되었다.

함태영(咸台永, 1872년 10월 22일 ~ 1964년 10월 24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 정치가, 목회자이다. 법관양성소를 졸업하고 한성재판소에서 검사시보로 법조계 근무를 시작했다. 1919년에는 파리강화회담에 보내는 독립탄원서를 작성했고 3·1 운동에는 민족대표 48인 중 한 사람으로 참가했다. 해방뒤 제3대 부통령을 지내기도 했다. 아호는 송암(松岩). 본관은 강릉(江陵). 함경북도 무산 출생이다.

나라의 독립과 민족 교회를 위한 복음
함경북도 경흥군 출생이다. 경성부의 피어선기념성경학원(현 평택대학교)을 졸업한 뒤 일본에 유학하여 1926년 아오야마학원 신학부를 졸업했다.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한경직, 김재준과 함께 공부했고, 펜실베이니아 주의 웨스턴 신학교에서 신학석사(1930년)를, 콜로라도 주의 덴버 대학교에서 신학박사(1931년) 학위를 취득했다. 귀국하여 평양의 산정현교회 전도사를 맡았다가 1932년 평양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아 이 교회 담임 목사가 되었다. 그러나 송창근의 진보적인 '신신학'은 교회와 마찰을 일으켰고, 결국 당시 장로교단을 대표하는 대형 교회였던 산정현교회에서 좌천되듯이 밀려나 1936년에 부산으로 내려갔다. 부산에서는 성빈학사를 설립하고 빈민구제 등 사회 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조선신학교(현 한신대학교)를 세워 교장에 취임하고 서울역 인근에 서울성남교회의 전신인 바울교회를 설립해 목회 활동을 했다. 1951년 7월 경 평양 인근인 대동군에서 병사했다는 증언이 내외문제연구소를 통해 공개된 바 있다.

신앙양심과 학문의 자유
1901년 함경북도 경흥에서 태어났으며, 청년기에 개신교로 개종했다. 그는 유학자 아버지에게 사서삼경과 동양고전을 배웠으며, 일본 도쿄 아오야마(靑山) 학원 신학부와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에서 공부하였다. 프린스턴신학교에서는 구약성서학으로 학위를 받았다.1933년 평양 숭인상업학교에서 성서를 가르쳤다. 김재준은 1940년 조선신학교(현재 한신대학교)를 세운다. 이는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때문에, 선교사들이 평양에 소재한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일명 평양신학교) 가 폐쇄되자, 김재준은 조선신학교를 설립하였다. 하지만 성서비평학 수용여부로 대한예수교장로회와 갈등을 겪게 되면서 1935년 ‘어빙던(Abingdon)단권성경주석(單券聖經註釋)사건'이 일어났을 때 송창근(宋昌根)·한경직(韓景職)과 함께 신학자들로부터 성서의 문자적 무오설(축자영감설)을 부정한다는 공격을 받았다. 이후, 1953년 장로교 목사직을 파면당하자, 김재준은 대한성공회와 더불어 가장 진보적인 교회로 불리는 한국기독교장로회와 조선신학교(한신대학교)을 설립하여 분립해 나갔다. 1969년, 당시 대통령이자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대통령이 권력의 민간인 이양약속을 어겨 국민을 속이자, 김재준 목사는 군사독재정권에 반대하는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

독립운동과 반군부독재 투쟁
장준하(張俊河, 1918년 8월 27일 평안북도 의주 - 1975년 8월 17일)는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정치가, 공무원, 언론인, 사회운동가, 잡지발행인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제1공화국에서 공무원에 임용되어 1950년 문교부 국민정신계몽 담당관, 1952년 국민사상연구원 기획과장, 서무과장, 사무국장 등을 지내고 《사상계》를 창간하였다. 제2공화국 당시 장면내각의 문교부 대학교육심의회 의원, 국토건설단 기획부장, 국토건설단장 등을 지냈고, 초기에는 5·16 군사 정변을 지지했으나 군정 이후 한일회담 반대운동, 베트남 전쟁 파병반대운동에 가담했다. 6대 대선에서 윤보선의 지지 유세 중 박정희의 친일파 경력을 문제삼았다가 국가원수 모독죄로 옥고를 치렀고, 이후 신민당과 윤보선과 함께 국민당에서 활동했다. 1975년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등산 중 추락하여 사망하였다.

한반도 민주화와 민족의 통일
문익환(文益煥, 1918년 6월 1일 ~ 1994년 1월 18일)목사는 한국 기독교 장로회 목사이다. 기독교 사상을 삶으로 실천한 목사이자 통일운동가,사회운동가이며 참여시인으로 재야 민주화 인사이다. 호는 '늦봄'이다. 문익환 목사는 통일이 되지 않으면 민주화가 되지 않는다는 진보적 기독교인들의 신념에 따라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에 참여했기 때문에 기독교 사상에 근거한 사회운동을 한 정도로만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성서학자로도 활동하였다. 그 실례로 문익환 목사는 감리교 목사인 이현주 목사와 함께 공동번역성서 번역에 개신교측 번역자로 참여했으며, 구약성서를 알기 쉽게 설명한 [히브리 민중사](삼민사 刊)를 저술하였다.

성문 밖의 예수, 그리고 이 땅의 민중신학
1922년 평안남도 신의주에서 태어났으며, 간도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서울대학교에서 사회학을 전공했고, 하이델베르크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3년 한국신학연구소를 설립하여, 한국의 민중신학 연구에 몰두했다. 현재도 한국신학연구소는 계간지 《신학사상》(神學思想)와 신학서적들을 간행하고 있으며, 진보적인 기독교출판사 중 한 곳으로 평가받는다.[1] 안병무는 1953년 5월 17일 한국기독교장로회 향린교회를 홍창의 등 12명의 형제들과 함께 생활공동체, 입체적 선교공동체, 평신도교회, 독립교회라는 네 가지 창립정신을 가지고 설립하였다. 저서로는 성서연구서 《역사와 해석》(1981년作, 대한 기독교 출판사 刊),《갈릴래아의 예수》 등이 있다.

대화를 통한 사회의식화 교육과 종교간 대화
강원용 (姜元龍, 1917년 10월 30일 함경남도 이원군 ~ 2006년 8월 17일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은 장로교(한국 기독교 장로회)목사이며 교육자·시민사회운동가였다. 1945년이후에는 좌우합작운동에 투신하였고 한국 기독교 장로회에서 활동했으며, 1972년 10월 유신 이후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윤보선 전 대통령·월남 퀘이커 교도 함석헌 등과 함께 반 유신 운동을 주관하기도 했다. 크리스찬아카데미, 평화포럼 등을 조직했다. 아호는 여해(如海).

세계신학의 순례자, 눌린 자들을 위한 민중신학
서남동 목사는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면의 기독교 집안에서 출생했다. 그의 부모는 전라남도 목포시에서 활동하던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사들의 전도로 기독교를 접했는데, 서남동도 부모의 영향으로 기독교인이 되었다. 기독교 학교인 목포영흥학교와 전주신흥학교에서 공부했으며, 1936년 일본 도시샤 대학교 신학부에 진학했다. 외국어 공부과정인 예과 2년과 4년제 본과에서 공부하던 신학생 시절 서남동은 재일 한국인들의 비참한 삶을 보면서 민중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53년 한국신학대학(현 한신대학교)의 초빙으로 신학 교수가 되었으며, 캐나다의 진보적 개신교 교회인 캐나다 연합교회의 지원을 받아 토론토 대학교의 엠마누엘 칼리지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공부했다. 귀국후 연세대학교신과대학 교수로 일하면서 세계신학을 한국교회에 알리는 '세계신학의 안테나'역할을 했으며, 역사의 주체인 민중의 편에서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의 유신독재에 저항했다. 그래서 박정희 군부정권의 탄압으로 해직당하기도 했다. 1984년 해외순회강연을 다녀온뒤 입원한 세브란스 병원에서 별세하였다.